사랑받지 못했다고 해서 세상을 사랑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.

제가 게을러서 다음편이 좀 느려 졌네요.

전 이 제목 자체가 너무 맘에 들었습니다.
제가 꼭 아이를 낳으면 알려주고 싶은 문구 이기도 합니다.
사랑 받는 아이도 행복하겠지만, 사랑을 할 수 있는 아이가 되기글 바라며...


오랜만에 B사라는 절에 다녀왔다. 그 절은 젊은 시절 한때 불처럼 뜨거웠던 피를  지금과 같은 적정한 온도로 식히게 된 계기를 마련해 준, 말하자면 개인적으로는 좀 각별한 장소이다. 20대 초반, 나는 이미 이런 저런 일로 세상에 몇 번 된통 치여 학교에서 쫓겨날 만큼 문제아로 전락해 잇었다. 당시는 누구의 손도 닿지 않는 곳에서 이름 모르게 시들어 가는 야생화 처럼 폐쇄적으로 살고 있던, 그야말로 피폐한 시절이었다.

그 시절 나는 꿈같은 친구를 하나 만났다. 탤런트 처럼 잘생겨으며, 언변이 매우 능하고, 재능이 다양하며 붙임성이 좋은, 그런 데다 마음마저 기디깉은...... 뭐랄까? 그 친구 하나만으로도 여러 명의 좋은 친구들을 한꺼번에 만난 듯한, 평생 한 번 만나기 힘든 출중한 그런 친구였다.

그즈음 인문계열 공부를 하고도 가정 형편상 눈물을 머금고 자연계열을 택했던 치들이 대부분 그랬던 것처럼, 자연계열을 택했던 치들이 대부분 그랬던 것처럼, 자연계열을 전공하면서도 나는 그나마 어학에 좀 눈이 밝았다.
그때 공통영어 담당 교수님의 지도 방법은 참 특이했다. 다짜고짜 첫마디가 필기시험을 아무리 만점 받아야 50%밖에 인정할 수가 없다는것이었다. 나머지 50%는 출석률과 독해력, 영어로 질문했을 때 영어로 답하는 내용으로 학점을 매기겠다고 했다. 몇 개의  비슷한 학과 학생들이 같이 그 수업을 들었는데, 첫 시간이었다.

학번 순으로 단원 1을 읽고 독해한 뒤 교수님의 몇가지 물음에 영어로 답하는 수업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.
다들 들뜬 마음으로 기분 좋은 첫 수업을 기대했던 우리는 아연실색했고, 전부 지레 겁을 먹어 수업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될 지경에 이르렀다. 다행히 나와 이 친구는 번호가 뒤쪽에 있었는데, 이 친구가 나보다 10번즘 먼저 배정되어 있었던 것 같다. 거의 말미 쪽에 배정된 나는 마침 가져온 사전이 있어 단어 몇개를 찾아 단원 1을 쉽게 독해해 놓고, 교수님께서 나에게 질문하실 내용이 무엇을까 궁굼해 하고 있었다.

이 친구가 먼저 독해를 했으나 중간 어딘가에서 막혀 중도 포기하고 말았다. 드디어 내 차례가 왔고 막힘없이 단원 1을 독해했다. 독해가 끝나고 교수님의 질문이 바로 이어졌다.

"What's the worst thing in the world(세상에서 무엇이 가장 괴로운 일인가)?"

단원 1과 연관된 질문을 기대했던 나로서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'워스트worst라...... 그래, 지금의 내 심정이 바로 저런 것과 흡사할 테지'라는 생각이 문득 머릿속을 스쳤다.

"It's awful not to be loved(사랑받지 못한다는것이 가장 끔직하다)."

나의 이 대답에 교수님의 표정이 아주 짧은 순간 굳어졌다가 퍼졌다. 교수님은 천천히 나에게서 눈을 떼어 자신의 노트를 내려다보더니 문득 생각난 듯 나의 학과와 학번, 이름을 다시 물으셨다.

강의가 끝난후 그 치누가 내게 와 자신과 친구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. 그즈음 사람 사귀는 일이 흔치 않을 폐쇄적인 상태였으므로 그리 흔쾌한 표정은 아니었겠지만 그 친구의 스스럼 없는 접근에 수락을 하였으리라.

둘의 우정이 깊어진 어느날, 친구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.
"내가 사랑받지 못했다는게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니지 않아?"
당연히 나는 아무 말도 할 수없었다. 친구의 거침없이 밝고 순수하고 활달한 성격은 내가 막다른 길에 다다를 때마다 가야 할 길을 뚫어 주었으며, 나는 그 친구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새로운 방식을 무수히 배웠다. 이후 우리는 빛과 그림자 처럼 어울려 각종 행사와 모임을 주도하고 다녔으며, 나중엔 그 친구의 할머니께서 심장병 치료를 위해 용양 중이시던 B사의 아랫동네인 중산리로 놀러가게 되었다. 조그마한 과수원을 가지고 계시던 할머니께서 자주 가서 폐를 끼쳤는데, 할머니도 무척 밝은 성품이였으며 나의 처지를 늘 위로해 주셨다.

물론 폐 끼친 죄로 과수원 일도 열심히 해드렸고, 초겨울에는 산에 가서 잔뜩 나무를 해와 장작을 산더미처럼 패드리고 했다. 방학 땐 그 동리 아이들을 열심히 가르쳤다. 내가 군대 갈 즈음에 할머니께서 나를 위해 삼신할에게 치성을 드릴 만큼, 손자 아닌 손자가 되었다.

그 친구나 할머니가 없는 B사라던가 그 산길을 나 혼자 거니는 일은 아직도 내겐 대단한 즐거움을 준다. 절도산도 세월이 자남에 따라 옛모습을 많이 잃었지만, 올바르고 곧은 심성으로 나의 헛되고 비루한 생각들을 다독여 괴로움의 구덩이에서 건져 올려준 이 친구를 만난 것을 나는 내 인생 일대의 가장 큰 행운이라 생각한다.
사랑이라거나 그 비슷한, 고매한, 어떤 것을 초월한 듯한 말투를 나는 존중하지 않는다. 인간냄세가 나지  않기 때문이다. 사람이라면 어쨌든 사람을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. 어려움과 난관이 아무리 크다해도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능가할 수는 없다. 사실 지나고 보면 그 어려움과 난관이란 사랑해야 하는 이유에 비해 얼마나 사소한 일이던가?
참고로 '사랑받지 못한다는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괴로운 것이다'라는 말은, 내 머리로 궁리하여 만들어낸 말이 아니다. 제임스 딘이 출연했던 영화 <에덴의 동쪽>에서 아브라가 한 멋진 대사를 내가 외워 두었다가, 적시적소에 한번 차용해 본 것뿐이다.

물론 그 옛날 저 멋진 아브라의 대사는 이제 내 마음속에 그리 깊은 의미로 남아 있지 않다. 오히려 내 친구의 "내가 사랑받지 못했다는 것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니다" 라는 말을 더 가슴 깊이 새기게 되었다.
나는 이 말을 의미를 되새기며 세상의 참맛을 알게 되었다. 그 앎은 앞으로 내 앞에 놓일 어떠한 난관에도 결코 굴복되지 않을, 아주 동글고 참된 울림으로 내 맘에 새겨져 있을 것이다.

제가 곧 휴가를 가므로... 아마 또 올릴려면 함참 걸릴듯 해요.. 그것도 그렇게 책이 너무 좋아 다른분에게 빌려 드리기로 했습니다.
(회사 분들이 이 글을 보면서 불법 복제라 하시네요...)
그럼 모두들 좋은 하루 되세요

by 비앙카 | 2008/06/17 16:24 | 책을 읽어주는 서랍 | 덧글(4)

Commented by 飛影 at 2008/06/17 20:41
헤에...
은은하지만..강렬하게 와닿네요...
잘 보고 갑니다.
Commented by 비앙카 at 2008/06/18 12:46
제목이 정말 좋아요 >ㅁ<
Commented by blueday28 at 2008/06/17 21:48
좀 딴 소리지만...
전 아직까지는 제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줄만한 '한마디의 말'을
경험해본적이 없어서 어떤 느낌일지... 랄까 하여튼 궁금하네요-_-;
하여튼... 몇 번 다시 읽게 되는 참 멋진 말인 것 같습니다.
Commented by 비앙카 at 2008/06/18 12:46
그 책에 "제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줄만한 '한마디의 말'을
경험해본적이 없어서 " <- 이런 글도 있습니다. 나중에 시간이 되면 올려 드릴께요~

:         :

:

비공개 덧글

◀ 이전 페이지다음 페이지 ▶